교보생명교육문화재단

정보마당

전문가 칼럼

방관자가 없어야

손봉호(나눔국민운동본부 대표)

키티 제노베이스 사건이란 것이 있다. 1964년 19세의 제노베이스가 늦은 시간에 자기 아파트로 들어가려는데 강도가 하나 나타나 칼로 그녀를 찔렀다. 비명 소리를 들은 한 주민이 소리를 지르자 강도가 도주했으나, 10여 분 후 그녀가 아파트 뒷문으로 들어가려는데 다시 나타나 그녀를 찌르고 강간한 다음 49불을 빼앗아 달아났다. 처음 비명소리를 들은 사람이 10여 명(일설에는 40가정)이었으나 그 중에 한 사람도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다. 두 번째 장면을 목격한 사람이 겨우 경찰에 연락했고 수 분 후에 경찰이 도착했다. 구급차로 제노베이스를 병원으로 이송하였으나 제노베이스는 도중에 사망하고 말았다.

만약 처음의 비명소리를 들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라도 경찰에 신고했더라면 그녀는 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누군가 신고하겠지. 꼭 내가 해야 하나?” 하고 생각한 것이다. 관계자의 수가 늘어나면 개인의 책임의식이 그만큼 줄어진다는 소위 “방관자 효과(bystander effect)”가 나타난 것이다.

방관자 효과는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의 특성이니 어쩔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비록 인간의 고유 특성이라 하더라도 상황에 따라서는 심각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고, 따라서 너무 쉽게 묵과되거나 용인되어서는 안 된다. 현대 사회가 이룩한 변화들 가운데 적어도 두 가지는 방관자 효과를 결코 용인할 수 없게 한다.

그 하나는 인류가 물리적인 파괴능력을 가공할 정도로 키워놓았다는 사실이다. 과거에는 사람이 사람을 도울 수 있는 능력도 한정되어 있었지만 사람에게 해를 끼칠 가능성도 별로 크지 않았다. 칼과 창으로도 사람을 해칠 수 있으나 그 정도는 제한적이었다. 그러나 과학기술을 개발하여 만들어 놓은 핵무기나 독가스는 무수한 사람에게 엄청난 해악을 끼칠 수 있다. 옛날의 단순한 기술로 쌓은 둑이 터졌을 때와 발달된 현대 기술로 건설한 대형 댐이 무너졌을 때는 그 피해가 다를 수밖에 없다.

파괴력이 크면 클수록 그에 대한 사람들의 책임의식도 커져야 한다. 그런데 현대 사회는 사람이 키워 놓은 물리적 파괴력에 비해서 이에 상응하는 책임의식은 충분히 배양하지 못했다. 기차에 잔뜩 실은 폭약을 지키는 사람이 촛불을 켜 놓고 술에 취한 채 조는 동안 폭발이 일어나 이리시를 폐허로 만들고 무수한 생명을 앗아간 사건이 그 전형적인 예다. 달구지 모는 책임의식으로 비행기를 조종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거기다가 오늘날엔 대중화 현상이 일어나 방관자 효과가 확대되고 있다. “대중(mass)이란 단순히 많은 숫자의 사람이 아니라 개인들이 큰 무리에 함몰되어 자율성과 개체성을 상실하고, 근시안적이 되어 전체를 보지 못하며, 순간적이고 표피적인 쾌락에 몰두하면서 권리는 요구하지만 책임은 지지 않는 인간 군상”이라고 스페인 철학자 오르케가 (Ortega y Gasset)가 정의했다. 물론 과거에도 “아홉 마리 소에서 털 하나쯤이야”(九牛一毛) 하는 잘못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방관자 효과가 가져올 수 있는 위험도 커졌지만 방관자가 될 유혹과 가능성이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증가했다.

방관자 효과가 일으키는 가장 심각한 문제들 가운데 하나가 환경오염이다. 지구 온난화는 인류가 당면한 가장 큰 위험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를 인정하고 있다. 인류 전체의 생물학적 생존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연환경은 지금도 계속해서 악화되고 있고 그 때문에 지구 곳곳에서 이미 상당수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있다. 투발루(Tuvalu)와 몰디브(Moldives)는 나라 전체가 물속에 잠기고 있고 몽골에는 수백 개의 호수와 강이 사라졌다.

지구온난화는 적어도 두 가지 특성이 방관자 효과를 강하게 유발한다. 하나는 온난화가 너무 천천히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뜨거운 물에 개구리를 넣으면 개구리가 당장 튀어 나오지만 찬물에 넣고 천천히 대우면 온도의 변화를 잘 느끼지 못해 삶겨 죽는다는 말이 있다. 지구의 온도가 장기간에 걸쳐 매우 천천히 오르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 심각성을 피부로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지난 100년 간 지구 평균 온도가 0.74도 올랐다고 하는데 보통 사람이 느끼기에는 너무 미미한 변화다. 다만 합리적 상상력이 예민한 소수만이 위기의식을 갖고 경종을 울리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덤덤하다.

또 다른 하나는 온난화가 너무 거대한 전 지구적 현상이기 때문에 대부분 “나 하나가 소비를 절제하고 환경유해 상품을 불매한다 해서 문제가 해결될 수 없지 않나?” 하는 무력감이다. 오히려 역으로 “나 한 사람쯤이야” 라며 환경유해 행동을 주저하지 않게 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사람이 수십억이 되면 결과가 심각해진다는 것이다. 환경위기를 해결할 수 없는 단계로 이끌고 있는 것이 바로 이런 구우일모적(九牛一毛的) 사고방식이 아닌가 한다.

자연에는 본래 자동적인 자정능력이 있었다 한다. 살아있는 시냇물은 좀 오염되어도 스스로 정화할 수 있다. 그러나 오염도가 한계를 넘으면 자정능력이 죽어버린다 한다. 사회도 비슷하다. 지나치게 인위적이 되어서 이제는 사회의 생존을 자동적으로 보장해주는 “보이지 않는 손”은 그 이상 작용할 수 없게 되었다. 자연도, 사회도 이제는 모두 사람의 책임 아래 놓이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이 건강하고 사회의 지속이 가능하려면 우리가 같이 타고 가는 배에 구멍을 내는 사람이나 그런 것을 방관하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