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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칼럼

오래된 새길 인간화

강대인(대화문화아카데미 원장)

오늘, 인간은 존엄한가?

우리가 서있는 자리, 성찰이 없는 사회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 요청되는 시점이다.
40여 년 전, 크리스챤아카데미(현,대화문화아카데미)는 [인간화(On Humanisation)대화모임](1970.10.8.-11/서울,아카데미하우스)을 열었다. 70년대 당시 핫 이슈는 근대화, 산업화, 도시화 등이었고, 이 과정에서 예상되는 비인간화의 심각성을 다루는 모임이었다. 13개 분야의 학자 전문가들이 모였던 3박 4일 동안의 숙의 과정을 거쳐 한국사회의 비인간화의 주요원인은 ‘정치화와 양극화’에 있다는 진단이 내려졌다. 이때부터 우리 사회에서 인간화, 대화라는 말이 쓰이기 시작했다

이어진 후속 모임에서 비인간화를 극복하기 위한 처방으로 ‘정치와 경제의 민주화’가 제시되었으며, 민주화를 실제로 추진할 주체로 중간집단을 길러야 한다는데 의견이 모아졌다. 이후 중간집단 리더십 교육으로 활발히 이어졌으나 안타깝게도 1979년 크리스챤아카데미 사건으로 이 프로그램은 접을 수밖에 없었다.
1970년 인간화 대화모임 이후 40년 만에 [오래된 새길 인간화] 대화모임이 다시 열렸다. (2010년 10월21-22일/경기도, 메이필드호텔) 이 모임에서 박은정교수(법철학, 서울대)는 “다시 인간화를 말한다”라는 글을 통해 이러한 제안을 했다.

“첫째. 소비자처럼 행동하지 말자. 물질만능주의는 생활자들을 ‘소비자’라고 부르는 측이 조장한 것이다. 둘째 ‘작은 민주주의’를 실천하자. 시민은 민주주의를 사랑해야 한다. 사랑하기 위해서는 작은 단위로 가야한다. 셋째, 동료 인간에 대한 자애와 공감이라는 인간성이 절실하다. 불평등이 현실임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면, 약자에 대한 존중을 실천하는 “존중의 정치학”을 새로운 정치학으로 제안한다. 마지막으로 이방인처럼 행동하라. 인류가 지금까지 물질세계와 맺었던 관계를 바꾸어 자기 땅처럼 함부로 지배할 수 없는 낯선 땅에 들어온 손님처럼, 이방인처럼 느끼면서 행동하라.”

1970년과 2010년, 두 번의 [인간화 대화모임] 사이에 4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한국사회는 엄청난 변화를 겪었고 삶의 모습도 많이 달라졌다. 그러나 양극화를 비롯한 비인간화 현상은 여전히 이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고 있으며, 격차사회의 그늘에 있는 사회적 약자들에게서 삶의 의욕을 앗아가고 있는 게 현실이다.

엄혹하고 험난했던 지난 세기도 우리는 우리 사회의 비인간화에 맞서 치열한 저항의 세월을 보냈다. 절대적인 가난에서 벗어났고 폭압의 시절도 어렵게 지나갔다. 그러나 돌아보면 얻은 것 못지않게 잃은 것 또한 너무도 많았음을 뒤늦게 자책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서로의 관계가 너무나 멀어지고 느슨해졌다. 인간적 삶의 토대가 되는 ‘하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의 관계가 점점 더 뒤틀리고 끊어져 가고 있다. 기독교에서는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떨어져 나오는 것을 '타락(fall)'이라고 말한다. 지난 세기의 급속한 사회변동 과정을 겪으면서 우리가 같이 바라볼 ‘하늘’은 우리들의 시야에서 벗어나 너무도 멀어졌다. 의미 있는 인간적 관계성이 사라지면서 격차사회의 그늘에서 살아가는 사회적 약자들에게는 삶을 스스로 마감해야하는 비극적 선택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돈’(경제복지)만의 문제가 아니고 인간(관계성)에 대한 몰이해에 더 큰 뿌리가 있음을 보여 준다. 실로 인간존엄의 위기, 인간의 위기이다.

무수한 약자들의 슬픈 죽음에 연민과 공감이 없는 이 시대, 우리 사회의 인성의 피폐화와 네크로필리아(necrophilia)적 현상은 6년째 지속되는 세계 최고의 자살률이 그대로 입증하고 있지 않은가. 인간적 삶의 두 기둥인 ‘일과 사랑’의 뿌리가 흔들리는 현실에서 많은 인간들은 떠도는 불안의 유령들을 피해 시장이 제공하는 찰나적인 자극과 사이비 행복감을 찾아 소비대중으로 상품화 되어가고 있다.

'돈에 돈(돌다)', 돈이 생명인 ‘인간의 상품화와 사회의 시장화’는 이 시대 비인간화의 두드러진 병리현상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우리 사회의 비인간화 현상을 극복할 사회적 공공 영역의 기제들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는 현실이다. 급격한 시대 변천으로 인해 기존의 전통적인 사회 체제인 국가, 미디어, 종교, 대학 등의 공공 영역도 시장화되고 제 역할을 못하고 있으며, 천륜적인 질서로 믿었던 가정(가족제도)도 흔들린 지 오래다. 이에 따라 결혼의 패턴과 가족의 구조도 급진적으로 변모하고 있다. 지식의 속도도 빨라지고 학문사회도 세분화, 전문화되면서 대학도 더 이상 학문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어렵게 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지성적인 지식인 사회의 모습도 점점 사라지고 ‘공인의식 없는 공인’들도 늘어나는 것 같다. 이는 우리 사회의 공공성 위기로 이어져 실로 우려되는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생명가치를 찾는 녹색의 인간화

21세기형 인류가 살아갈 삶의 현실은 실로 중층적인 복잡성으로 인해 예측과 전망이 불확실하다. 또한 지구평화와 인류의 삶에 치명적인 위해를 가져올지도 모를 기후 변화까지 생태계의 위기가 우리 앞에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다.

자연-생명-생태계는 하나의 동태적인 균형이다. 인간은 자연-생태계의 한 부분이기에 인간의 활동범위는 이 자연 생태계 안에 절대적으로 제한되어 있다. 이 제약을 넘어서면 자연 생태계는 붕괴되고 만다. 이것이 지금 인류의 위기다. 이처럼 긴박해지는 인류의 생태학적 위기를 무력경쟁과 개발경쟁을 부추기는 기존의 사회체계에서는 해답을 찾을 수 없다. 지난 세기의 삶의 위기는 국가, 지역, 가정에서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인간적으로 해결이 어느 정도 가능한 문제였다. 그러나 현재의 위기는 다르다. 전 인류의 범지구적인 생물학적 위기이다.

우리 사회에서도 환경문제에 대한 문제의식은 지식인 사회를 중심으로 산업화가 시작되던 1960년대 중반부터 이어져 왔다. 1970년에 열렸던 인간화모임에서 주목할만한 발제를 했던 서남동 교수(작고, 연세대. 신학) 는 “지구를 덮고 있는 생물권이 하나의 삶의 그물이고 그것은 거대한 하나의 몸이다. 이러한 몸이 총체적으로 지니게 되는 그 중심점이 ‘지구의식’”이라고 말했으며, 권숙표 교수(연세대, 예방의학) 등도 공해문제, 자연생태계의 파괴 등을 우려하는 의견을 강력히 피력했다. 1980년대 김지하 시인을 위시한 박재일, 장일순 선생 등이 시작한 문명론적 접근의 생명운동(한살림)은 생명가치를 중심으로 한 새 문화를 여는 초석을 마련해 주었다.

시민사회를 기반으로 환경운동도 대중적으로 확산되고 있으며, 최근에는 후쿠시마 재앙을 계기로 한국에서도 녹색정당이 생겼다. 그러나 2012년 양대 선거를 돌아보면, 다음 세대의 생존문제인 기후변화를 비롯한 환경재앙과 생태계위기에 대한 정치권의 무지와 무책임을 보는 심정은 참담하기만 했다. 이러한 정치권의 환경문제에 대한 소극적 관심은 이 문제가 일반유권자들의 우선적인 관심사가 아니라는 알리바이로 작용함을 부인하기 어렵다.

많은 사람들이 규범적으로는 환경문제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생태적 사유를 기반으로 한 생명가치의 의식화, 내면화가 쉽지 않은 것 또한 사실이다. 결국 인간에게서 비롯한 환경문제는 인간의 책임으로 돌아오고 있는 현실이 가시화되고 있으며, 향후 인류가 짊어지고 갈 십자가가 될 것이다.

지금까지 외부환경(Umwelt)을 바꾸려는 노력에 비해 자연과의 관계에 대하여 인간 스스로가 얼마나 달라지고 있는가? 생태계 위기의 비극성은 엄밀하게 볼 때 외적인 환경(Umwelt)에 있기보다 인간 속성인 자기중심성(탐욕)에 기인하고 있다는 불편한 진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러한 인간의 속성 때문에 '후회할 때는 이미 파국'일 미래완료형 재앙이 일어나리라는 어두운 전망이 우리를 더욱 곤혹스럽게 한다. 환경재앙으로 닥쳐올지도 모르는 파국은 인류의 업과이다. 이제는 사회문제 중의 하나로 환경문제에 관심을 갖던 종래의 컨테이너식 사고에서 벗어나 ‘우주적 공공성 창출’을 지구 아젠다의 중심에 놓고 생명가치를 기반으로 한 민주화, 복지화, 인간화를 논의해야 시점에 와 있다고 본다.

다행스럽게도 하늘과 소통하고 이웃들과 나누고 다음세대를 생각하며 자연과 더불어 인간적인 삶을 살아가려는 자비의 길, 공존(inter-being)의 길을 찾아가는 변화의 새 물결이 우리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음은 그래도 우리에게 희망을 준다. 이제는 화폐 가치보다 생명 가치를 우선하는 ‘녹색의 인간화’가 21세기를 사는 우리의 선택이다.
(*'녹색‘은 산업화의 결과, 달라진 삶의 컨텍스트와 지구위기에 따른 21세기형 패러다임을 상징한다. 새로운 패러다임은 관계론적 생태적 사유를 기반으로 한 바이오필리아(biophilia)적 지향성을 갖는다.)

요기- 사르의 길

지난 세기까지 인류역사에서 보면 커미사르(commissar)적 전통 또는 요기(yogi)적 전통에서 인간 해방과 평화 구현을 향한 큰 흐름이 있었다. 어떠한 사람들은 인간적인 사회를 위해 현실적 힘을 통한 <사회구조변혁>에, 어떤 사람들은 <마음의 깨달음과 평화>에 뜻을 두었다. 지금까지 이 두 가지의 길은 타당성을 인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라진 시대 상황에 따라 컨텍스트가 달라졌다. 인간적 삶의 위기다. 이 시대, 인간적인 삶이 자리할 작은 거점은 어디에 있을까? 우리가 서 있는 자리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 요청되는 시점이다. 인류는 지금 문명전환의 엄청난 관문을 통과하고 있다. ‘멸절의 길’ 아니면 ‘생명의 길’. 어디로 갈 것인가?

하지만, 인간(나)도 달라질 수 있다는 불가능한 가능성(impossible possibility)에 대한 믿음과 희망마저 버릴 수는 없지 않을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들, 멀리 있는 것들에 대한 우주적 사랑(cosmic love)이 '자연의 어떤 것’이 인간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 지구가 인류의 어머니라는 말은 한낱 감상적 수사가 아니라 과학적 사실이다. 삶의 율동 자체가 지구가 태양을 도는 우주의 절주(節奏) 즉 리듬이다. 이와 같이 인간이 자연과 연결되어 있다면 ‘자연의 어떤 것', 끊임없는 변혁의 원천수(源泉水)에 대한 숙고가 절실히 필요한 때이다. 요기-사르(yogi-ssar)의 흐름을 이어가는 녹색 코드의 인간화를 향한 지구양민(地球良民)들의 새로운 움직임을 기대해 본다.